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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사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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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이일섭 2026년 09월 535호
제주도에는 대략 300여개의 절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라산에 있는 작은 절 천왕사로 길을 잡는다.
천왕사로 들어가는 길은 입구부터 절 앞까지 측백나무들이 계속 따른다.
약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 양옆으로 30미터가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빽빽하다.
삼나무 숲과 철조망 너머로 한가롭게 걸어다니며 풀을 뜯는 말. 잘 뻗은 목선과 힘찬 다리를 지닌 상서로운 동물.
산록도로를 달리다보면 한라산을 배경으로 이 같은 풍경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산록도로는 비탈진 초지와 산바람을 느끼며 쉬엄쉬엄 달리는 맛이 좋은 길이다.

절 마당 위로 천불전이 있고 전각 뒤에는 절벽 같은 봉우리가 있다. 전각 양옆으로 크고 작은 개울이 흐른다.
마당엔 큰 나무가 두 그루 있고, 평상과 벤치가 놓여 있다. 바쁠 것이 없는 한가로운 오후.
절집 마당엔 제주도 절집의 특징인 까만 현무암 모래가 깔려 있다. 발을 뗄 때마다 들리는 ‘사각 사각!’ 소리.
구멍이 숭숭 뚫린 검고 가벼운 돌 주위에는 양치식물들이 가득하다.
고생대부터 지구에 살기 시작한 원시식물들과 제주조릿대가 섞여 땅을 덮고 있다. 개울 건너 단풍나무는 안개와 바람에 흔들린다.
습한 기운이 온 절을 뒤덮고 있다.

천불전 뒤에서부터 갑자기 안개가 밀려든다. 너무나 빠르게 절벽을 넘어오는 안개. 일순간에 절을 뒤덮었다.
10미터 정도 앞도 희미하다. 안개에 쌓인 절집은 더욱 조용하다.
쌀뜨물 같은 안개가 깔리니 조금 전까지도 확연히 보이던 천불전이 숨어버렸다.
불확실한 것을 ‘안개에 쌓인 것 같다’고들 하지만 확신이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햇살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안개는 곧 걷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