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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땅, 작렬하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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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이일섭 2026년 09월 535호
톨게이트를 통과해서 고창에 들어와 선운사로 향하는 길. 고창은 인물이 많은 고장이다.
미당 서정주, 신재효, 동학혁명의 중심에 섰던 손화중 역시 이곳 사람이다.
1894년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학정은 날로 더해 가고 원성은 그치지 않으니 국가의 위험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라고
‘창의문’을 발표한 뒤 혁명을 일으킨 땅. 미륵이 굽어보고 있는 땅이다.

봄에는 동백이 피고, 늦여름에는 상사화로 붉으며, 가을엔 단풍으로 선운산이 타들어 간다. 동백 숲의 봄은 온통 붉다.
나무에 달린 꽃이 붉고 모가지채 떨어진 꽃이 쌓여 땅이 붉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 청년기의 숲이 무성하고 푸를 때,
길을 따라 걸으면 개울에 비친 단풍이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의 초록으로 빛난다.
개울 가득 연초록과 짙은 초록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보인다. 가을이 되면 불꽃 같은 선운사 단풍이 작렬한다.
이른 아침 개울을 따라 왼쪽으로 개울을 끼고 걷는다. 햇빛이 숲으로 들어오며 개울엔 물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낮게 깔린 안개와의 동행. 한낮의 반짝임과는 또 다른 고즈넉한 분위기, 숲 속이 밝아지기 시작하면
나무들 사이로 다투어 쏟아져 들어오는 빛. 붉은 단풍이 덮인 개울도 이내 거울처럼 빛난다.
거울 위에 깔아놓은 단풍잎. 햇살을 피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올려다본 하늘엔 붉은 잎들이 쏟아지는 별과 같아 보인다.
개울엔 이미 성미 급한 단풍이 떨어져 쌓여 있고, 작은 돌을 건너지 못한 단풍이 걸려 있다.
아가의 손바닥만한 잎들이 바람에 떠다닌다. 단풍은 나무의 몸통을 배경으로 하여 더욱 빛난다.

나무와 나무 사이, 사람과 나무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나뭇잎과 사람 사이의 두께, 그 안에는 공기가 있고 바람이 있으며
빛이 존재한다. 느껴지지 못하는 두께 속에 무수한 것들이 움직인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리가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향기가 스치고, 햇살이 부서진다. 노랗고 붉은 저 잎 뒤에, 그 옆에, 그리고 또 그 뒤에는 어떤 두께가 있을까?
이곳에서 단풍까지의 두께, 단풍과 나무 사이의 두께, 그리고 숲의 두께를 담고 싶다.
그리고 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헤아리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