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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버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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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이일섭 2026년 09월 535호
백제의 미소가 있는 서산. 아이 같은 마애삼존불의 천진하고 건강한 미소가 맞이한다.
전국에 산재된 많은 ‘국보’들이 유리 상자 속이나, 전각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이곳 역시 전각 안에 있다.
원래는 전각 없이 바람과 태양을 벗하고 있었는데 보호라는 이유로 집을 짓다보니 그 안에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일출부터 일몰 때까지 천공 광을 받으며 웃고 있었을 미소를 상상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게 되는 것은 장대 끝에 백열등을 매달아 좌우로 빛을 비추어 주는 관리인이다.
오는 사람들마다 일일이 등을 옮겨가며 마애불의 미소를 보여주려는 그 이의 성실함에 박수를 보낸다.
비록 안에 갇혀 있는 형국이 되어버렸지만 악조건하에서도 웃고 있는 석불을 보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미소’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돌이 물질로서의 기능을 넘어서는 좋은 예다.

얼어 있는 몸을 따뜻한 미소로 데운다. 마애불과 이웃한 ‘보원사터’로 이동.
흰 눈을 덮어쓴 홍시, 차갑고 달콤한 붉은 셔벗이 순백의 들판에 달렸다.
석탑 주위엔 삼삼오오 짝을 지어온 이들이 눈밭을 뛰어다니며 신이 났다.
녹아버릴 눈처럼 희고 깨끗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
육포처럼 감정이 말라붙은 사람도 눈이 오면 즐거워한다.
누구나 아이의 모습을 찾아간다. 눈이 지닌 마술 중 하나이다.
즐거워하는 모습이 눈보다도 더 희고 환하다.

발자국 없는 눈길을 걸어서 마주 대한 마애삼존불. 그 푸근한 미소를 간직하며 겨울 여행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