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아!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라.
-부처님이 열반에 들며-
손끝으로 풀을 스치며 걷는 산길. 오르막은 소나무들에 둘러싸인 부도 밭을 지난다. 작은 갈래 길들은 산내 암자들로 흘러들고, ‘희랑대’라고 쓰여진 동글 넓적한 돌을 따라 암자로 향한다. 도토리를 줍느라 바쁜 아낙들이 여기 말로 ‘꿀밤’을 내보이며 웃는다. 지금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모두 겨울 준비에 들어가는 계절인가 보다. 가을 숲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소출은 많으나, 산짐승들의 몫도 있으니 풍요로움을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읽었는지, 다람쥐가 아낙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희랑대는 ‘희랑 조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희랑 조사는 889년 2월 15일에 거창에서 출생하였다. 902년 9월 10일 해인사에서 득도하였으며, 928년에는 해인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39세 승랍 26년 때의 일이다. 조사는 화엄경을 강하여 명성을 얻었다고 전한다.
암자는 마치 산비탈을 따라 흘러내리듯 붙어 있다. 입구에서 보여지는 모습이 전부일 정도로 아담한 곳이다. 대부분의 산내 암자가 그렇듯 이곳 또한 입구의 일주문이나 사천왕상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요사채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전각들을 지나니 공양간이 나오고, 10여 미터의 오르막 계단이 이어진다. ‘독성전’이다. 이곳엔 아난 존자를 모셨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좌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부처님 제세 시 가장 긴 시간(25년)을 시봉하였던 제자가 ‘아난 존자’다.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비록 내가 한 겁 동안이나 머문다 하더라도 결국은 없어지리니, 인연으로 된 모든 것들의 본바탕이 그런 것이니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라.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스승으로 삼아라. 진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예시하며, 슬퍼하는 아난 존자와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진리에만 의지 하라!’는 말은 숨을 몰아쉬게 한다. 지식을 얻고, 경험을 쌓고, 인연을 만들어 경제력과 명예를 얻고자 하는 생각으로 살아온 내게, ‘진리’라는 단어는 학창시절 노트 속에서 성장을 멈추어버린 듯하다.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온 대학시절의 책들과 간간이 펼쳐보는 일기장에는 지난날의 마음이 숨어 있다.
칼끝처럼 날카로운 이성과 신념으로 무장하려 애쓰던 시기를 거쳐, 젊음과 용기라는 갑옷을 입고 뛰어들었던 세상은 강의실에서 방류된 치어들이 꿈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너무도 유들유들했었다. 기름진 기성세대를 비판하며, 틈새를 파고들어야 했던 시간을 거치는 동안 마음 구석구석엔 상처가 났고, 진리가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덮어버린 일기장… 먼지가 앉았다. 여러 인연들에 얽혀 있는 생활은 ‘자기 자신과 진리에 의지하는 삶’과 먼 거리를 유지하고 말았다.
독성전을 빠져나오자 밀려오는 안개와 맞닥뜨렸다. 쌀뜨물 같은 공기방울에 가려진 숲과 전각, 그리고 나. 안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나무가 모습을 감춘 것인지? 소리 없는 물결처럼 밀려온 질문들이 너울을 만든다. 일기장 속에 쌓인 먼지처럼 날리는 안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