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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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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이겸 2026년 09월 535호
선의를 가진 이가 찾아오면, 선의로 맞아주면 족하다. 간소한 차림은 객의 부담감을 덜어준다. 오미자차로 겨울 북풍 한기를 잊는다.

조사전 문 위에 걸린 현판들

따뜻한 미소야 말로 천금으로도 얻을 수 없는 시간의 지층과도 같다. 감원 스님의 모습

절집의 온기
국일암은 가까운 거리에 약수암을 두고 있는 곳이다. 서로 붙어 있다시피 해서 국일암에서 내려다보면 약수암이 지척이다. 법당 쪽으로 가니, 신발이 놓여 있어서 기척을 내도 소식이 없다. 신발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니, 오랫동안 한곳에 있었던 듯 해 보인다. 금세 벗어 놓은 신발을 찾아 나선다. 문이 열리고 법당으로 향한다. 예를 올린 후, 감원스님에게도 절을 한다. 눈밭을 헤맨 것도 아닌데, 실내의 온기가 긴장을 풀어준다. 지은 스님과 소박하고 작은 다과상 앞에 앉는다. 참깨, 검은 콩, 찹쌀, 잣으로 만든 강정과 유과가 놓여 있다. 마치 착한 아이처럼 가지런하게 차려진 소반을 보고 있으니, 국일암 스님 네들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오미자차이다. 붉은 빛을 띤 차가 맑은 빛을 내고 있다. 따뜻한 김을 통해서 번져 나오는 향 때문에 궁금증은 한결 증폭되었다. 흔히들 새알이라고 불리는 작은 찹쌀 알맹이가 선홍색 차 밑에 들어 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와 달고도 신 맛이 좋다. 그해의 사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국일암에선 겨울철마다 유과를 해오고 있었다. 올해는 노스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번잡스런 일들을 줄였다고는 하지만 차려 내온 것만으로 충분했다.

작은집의 큰 창
국일암은 정남향 법당과 그 뒤로 지장전이 위치하고, 법당 옆으로 요사채와 노스님 채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작은 마당을 가로지르면 요사채 앞의 오래 된 건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해우소다. 아담한 규모로 남아 있는 목조 건물은 승주 선암사의 뒷간을 떠올리게 한다. 선암사 정랑을 건축가 김수근 선생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측간이다”라고 했었다. 옛날엔 측간을 ‘작은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해우소는 남여로 구분되어 있고, 나무 바닥이 깔려 있다. 해우소의 문짝은 물론 개별 공간의 출입문은 없다. 위가 뚫린 칸막이의 높이 또한 갈비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아담한 규모다. 일을 보고 나서는 낙엽이나 겨를 그 위에 뿌려서 거름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싸 갖고, 우리가 먹고……” 지은 스님의 말. 일을 보는 동안 참으로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눈높이에 맞추어 뚫어 놓은 창 때문인데, 가로로 길게 뚫린 구멍으로 앞 가까운 숲과 먼 산이 한번에 보인다. 조릿대가 바람을 타고 흔들리고, 상수리나무 가지에 새들이 오간다. 남원의 실상사 해우소에서 바라보는 산은 멀고 웅장한데 비해, 이곳은 가깝고 아기자기하다. 새소리와 바람이 드나드는 덕에 냄새와 근심을 모두 시원하게 풀어버릴 수 있었다. 국일암의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중건한 기록만이 있는데 ‘부휴 대사’의 문하인 ‘벽암각성 대사’가 이곳에서 오래 주석하면서 인조 15년 곧 서기 1637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벽암 스님’은 일찍이 글씨와 군법에 능통한 스님으로, 조선조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임금으로부터 ‘원조국일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국일암’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사 산내 암자 중 선방이 가장 먼저 생긴 곳으로 60~70년대 중반까지 운영하였다. 현재의 모습은 노스님인 성원 스님이 국일암에 들어온 후 다시 스러져가던 곳에 불사를 한 것이다. 이곳에는 부휴 스님, 고한 스님, 벽암 스님의 부도들이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