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칠선계곡 하류 산중턱에 자리 잡은‘서암정사’는 사경寫經을 수행방편으로 삼아온 벽송사의 조실 원응元應스님의 불사로 이루어진 곳이다. 사경은 통일신라에서 조선 초까지 행해진 불교 수행법의 하나로 마음을 모아 부처님의 경전을 한 자 한 자 옮겨 적는 것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1985년부터 시작해 12년 만에 완성한 화엄경 금니金泥사경寫經은 대승불교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의 전문 60만자를 금가루로 옮겨 적은 것이기도하다.‘백천강하만계류 百千江河萬溪流
동귀대해일미수 同歸大海一味水’
라 쓰여진 육중한 기둥이 양옆에 버티고 섰다.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 바
다를 이루고, 바다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인 듯하다.
‘깨달음은 멀리 있지 않다고 했던가?’돌기둥에 새겨진 글귀가 당연한 듯 싶다가도 곱씹을수록 새롭다.
‘대방광문大方廣門’이란 돌문을 지나니 자연 암석에 사천왕상들이 양각되어 있는데 예사롭지 않다. 그뿐 아니라 길을 따라 갈수록 절집의 진면목이 드러나니 걸음을 빨리 옮길 수가 없다.
서암정사의 불사가 시작된 계기는 원응元應스님이 1960년대 초에 벽송사 주지로 온 뒤 절집 주변에서 한국전쟁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발견하곤 그 원혼들을 위로하고, 남북한의 화합과 통일을 바라며 원력 불사를 일으켰다 한다. 그 원력의 결과가 현재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바위 위에 바위를 쌓아 만들어 놓은 탑과 마애불들이 절집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절 마당을 지나 극락전과 안양문 앞에 다다르니, 합장한 나한상들의 모습이 돋을새김 된 입구가 보인다. 석굴사원으로 들어서서 시간이 지나고 눈이 조금 더 밝아 지니 어두운 실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깥에서 상상했던 규모보다는 크다. 스님과 함께 불사를 진행했던 이가‘홍덕희’라는 석공으로, 무려 11년 동안 밤낮으로 매진했다고 한다. 굴법당을 둘러보고 있으니, 깊은 불심이 없었다면 가능이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석굴법당을 나오면 산 위로 돌계단이 다시 이어진다. 비로전으로 올라가는 길‘광명운대光明雲臺’라 새겨진 문을 지난다. 비로전은 커다란 자연석 세 개를 쌓고 그 위에 다시 큰 바위를 올려 만들었다. 아래 세 개의 바위엔 문수보살, 보현보살, 선재동자가 양각되어 있고, 그 맨 위엔 비로자나불의 모습이 보인다. 바위를 깎아 조성을 했지만 마치 찰흙으로 빚어 붙인 듯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더욱 생동감있게 다가온다.
석굴사원의 기원은 인도인데,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로 이어졌다. 본래 석굴사원은 수도자들이 자연재해를 피해 명상을 하던 곳으로 BC 3세기에 아소카왕이 만든 석굴이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전한다. 탑 대신 불상을 새기게 된 것은 대승불교의 영향. 중국의 용문산龍門山동굴엔 11만개의 부처상이 들어 있는 2,300개 이상의 동굴이 있고, 80개 이상의 사리탑, 절벽에 새겨진 2,800여개의 경판이 있으며, 그 길이만 1km에 이른다고 한다. 서암정사의 규모를 여기에 견줄 수는 없지만, 불사를 일으킨 원력은 다름이 없으니, 이곳을 찾은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행여, 석굴사원에 들어 규모나 눈요기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초심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