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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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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박동식 2026년 09월 535호
푸름은 밝음과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빛이다 마른 계곡을 사이에 두고 길은 잠시 갈라졌다 다시 합쳐졌다. 바닥만 보며 등산로를 오르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코스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행히 이내 다시 합쳐진 것이다. 바닥이 아니고 앞을 보며 걸어야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고견사로 오르는 초행길은 제법 험했다.
하기야 주차장에서 보았던 등산 안내도 입간판에서,우두산 최정상인 의상봉으로 향하는 등산로의 중간 지점에 고견사가 표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어느정도는예감하고있었던일이다.
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등산로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암석과 크고 작은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깔린 길은 때로 아담했고 때로는 남성적인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만나는80여 미터 높이의 고견폭포 또한 겨울 가뭄 때문에 실오라기처럼 약해지기는 했어도 그 위용을 짐작하기에부족함이없었다.
신라 애장왕(800-809) 때 순응順應과 이정理貞에의해 창건된 고견사는 한때 견암見庵, 견암사(見庵寺:見巖寺), 견암선사見庵禪寺라고 불리기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승려 수가 무려 70명에 이를 정도로 번창했으며 지금의 고견사라는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은 1630년의 일이다. 고견사를 가슴에 품고 있는 의상봉도 의상 대사가 참선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조 왕씨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밭을 주고 대궐의 향을 내려 해마다 2월과 10월에 수륙재를지내게한원찰이기도하다.
늦은 오후의 산사는 장막이 쳐진 것처럼 고요했다. 바람마저 잦아들어 풍경도 울리지 않았고 산새들도 모두 둥지로 돌아간 듯싶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대웅전에 불이 켜지자 삼각대에 카메라를 걸치고 하늘이 좀더 푸르러지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고요함이 세상과 산사 사이에 존재하는 장막이라면 푸름은 어둠과 밝음 사이에 존재하는 빛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견사의 밤은 고요와 푸름, 나그네의 기다림과 함께 점점낮게 내려앉고있었다.
다시 날이 밝았다. 아직 산등성이 위로 해가 솟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한 까치 한 쌍이 산사로 날아와 목을 축이고 날아갔고 대웅전 앞마당과 돌계단 곳곳을 쓰시는 노스님의 싸리비 소리
가 불경 소리보다 청명하게 들려왔다.이윽고 아직 열기가 오르지 않은 해가동쪽 능선 위로 얼굴을 내밀자 고견사 경내는 생동감이 일기 시작했다.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빛들은 대웅전 문살과 동종銅鐘의 볼록한 배는 물론, 세월의 더께처럼 마른 이끼가 덮여 있는 키 작은 석불의 어깨 위에도내리비추기시작했다.
그 빛의 끝자락들을 찾아 경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전날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석축이 눈에 들어왔다. 대웅전과그 앞마당 전체를 지탱하는 커다란 석축은 그 규모도 놀라웠지만‘허튼쌓기’의진수를 보여주는 예술품이었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모양도 서로 다른 돌들이 서로 어울려 견고하고도 반듯한 표면을 만든 것은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배려하며그 틈들을 양보하고 부둥켜안았기 때문일것이다.
다시 배낭을 챙겨 산사를 내려오며 그런 생각들을 했다. 우리들의 삶도 발끝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바라보며걷는다면 길을 잃을 위험도 적어질 것이고 자신의 발 뻗을 자리와 누울 자리만챙기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리도 염두에 두고 조금씩 베풀며 산다면 석축만큼이나 단단하고 반듯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렇게 고견사에서의 하룻밤은 나에게또하나의깨달음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