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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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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박동식 2026년 09월 535호
서상 요금소를 나와 좌회전을 한 후, 한눈팔지 않고 직진한 그 길 끝에 영각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끝까지 직진해야 한다는 사전 정보에도 불구하고 확장된 국도와 만나는 사거리에서는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지만 삼거리도 아닌 사거리에서의 직진은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분명했다. 길은 조금씩 산과 가까워졌고 작은 숲이 시작되는 듯싶더니 이내 차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막다른 길이 되었고 그곳에 포장되지 않은 주차장이있었다.
조금 흐린 날이었고 아주 잠시 이슬 같은 빗물방울이 날리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차분한 오후였다. 무거운 침묵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가벼운 흥분도 아닌,한걸음한걸음이그저산뜻하고담백한날이었다. 그날의 날씨처럼 영각사는 소박했다.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2층 누각은 세월이 지날수록 아름다워지는 전통 건축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요사채로 이용되는 1층은 격자창살 방문이 나란히 들어서 있었고 찻집으로 운영되는 2층은 독특한 창살문양이 인상적이었다. 마당에 높이 솟은 굴뚝도 이건물의 멋을 완성시키는 구조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있었다.
영각사는 신라 헌강왕 3년(877)에 심광 대사深光大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이후 폐사되었던 절을 조선세종 31년(1449) 원경圓瓊스님이 중창한 이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게 되었다. 순조 34년(1834)과 6 25전쟁 당시 불의의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건물들이전소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중수되었다. 안타까운것은 6 25 전쟁 당시, 산신각과 창고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었던 화재에서는 화엄경판 81권 3,284판과 범망경 2권 각판 68매까지 모두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화엄경판은 설파상언 대사雪坡尙彦大師가 감수監修하여 만든 것으로 문화재급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더욱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해운海雲스님에 의해 1959년 화엄전이, 1966년에는 극락전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2005년, 40여년을 지나온 낡은 화엄전이 새롭게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올해는 단청불사를 계획중이다.
마침 사찰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마을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중년 부부는 가끔씩 고향
에 내려올 때면 영각사를 찾는다고 했다. 어린 시절, 마을 아이들과 놀러올 때면 스님에게 호두를 한 움큼씩 얻어갔을 정도로 당시 영각사 경내를 비롯한 주변에는 꽤 많은 호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소풍 장소이기도 했다는 영각사에 그들은 꽤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잔가지 같은 추억들은 기억에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여전히 남은 기억들은 점점 짙어져서 결국은 향수가 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남은 기억은 사라진 기억의 무게까지 고스란히 대물림 받으며 더욱 깊고 아련해지는것인지도모르는일이다.
손님들도 돌아가고 나는 좀더 찬찬히 경내를 산책했다. 그러다 걸레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행자 한 분이 눈에띄었다. 갓 열아홉이 되었다는 행자는 맑은 눈빛을 갖고 있었고 부르튼 그의
입술이 다시 터질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그는 5월보다 화창하게 웃고는 했다. 보면 볼수록 행복해지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그는 분명 절 안에서 가장 행복할수있는 사람이란 생각이들었다.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한 이슬비는 바닥도 적시지 못하면서 쉽게 멈추지도 않았다. 미세한 기포들이 신발과 머리와 흙바닥에 만들어지고 있었고 굴뚝에서는 모락모락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군불이 지펴지는 산사를 뒤로 하고 나는 또 차를 몰고 도시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늘 아쉬움이 남는 일이지만 그리움은 또 잠시묻어두기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