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주 시내에서 응석사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4대.
예정 시간보다 일찍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렸지만 버스는 오지않았다. 결국 택시를 탔다.
택시가 왕복 2차선의 좁은 지방도로를 달리는 동안 하늘은 더욱 강렬해졌고 차창 밖의 논과 밭들도 그 푸른빛이 더욱 짙어졌다. 택시는 신호등이 있는 어느 갈림길에서 시멘트로 포장된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버스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버스는 내가 놓친 버스였다.
그 버스는 이미 응석사에 손님을 내려놓고 시내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버스를 나는 언제 놓친 것일까. 아무래도 잠시 딴 생각을 한 사이에 버스가 지나갔던 것이 아닌가 싶었다. 역시 눈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논길과 시골 마을 사이를 오가던 택시는 이제 산길로 접어들려는 참이었다. 그러다 어느 허리자락을 돌아서자 아담한 저수지가 나타났고 넓은 주차장 앞에 금단청이 화려한 일주문이 우뚝 서 있었다. 길이 잠시 산길로 접어들었던 것은, 산기슭에 숨겨 놓은 아담한 분지를 갑작스럽게 보여 주기 위한 애꿎은 장난이었다.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는 2층 종루의 아래를 지나 맞은편 계단을 올라가니 넓은 절집 마당이 하나 가득 여름빛을 받고 있었다. 그 빛이 워낙 건실해서 마치 어두운 석굴을 지나 밝은 세상으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름빛보다 더욱 건실한 대웅전이 그 너머에서 이제야 찾아왔느냐는 듯 의연하게 여행자를 맞았다. 서로 몸을 비비며 바람에게 길을 내주던 대웅전 뒤의 대숲 또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집현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응석사는 신라 24대 진흥왕15년(554)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진묵일옥(1562~1663)과 사명유정(1544~1610)이 머물러 수도하면서 화엄도량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되었었다. 당시 이 절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문수전, 극락전, 비로전, 영산전, 나한전, 팔상전 등과 163개의 방이 있었는데, 왜병들이 몰려와 관음전에 참배하던 중 관음상 밑에 숨겨 두었던 승병들의 무기가 발각되자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뒤 영조12년(1736)과 광무 3년(1899) 중수하여 오늘에 이
르고 있다.
대웅전 뒤쪽 텃밭에는 상추와 쑥갓들이 자라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심지도 않은 나비꽃이 제멋대로 자라서 밭을 이루고 있었다. 짙고 연한 보라색 꽃잎들이 자잘하게 달린 나비꽃은 어쩌면 북한에서 부른다는 족두리꽃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리는 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꽃밭 사이에 홀로 서있던 쌍사자 석등. 석등이 그곳에 자리한 연유를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응석사의 역사와 꽤 오래한 석등임에는 틀림없었다.
응석사의 관음전 뒤로는 무환자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1990년 경상남도기념물 제96호로지정되었다. 없을 무無, 근심 환患. 그 이름에 걸맞게 이 나무의 열매는 염주를 만드는 데 사용된
다. 지난 가을, 첫눈이 오기 전에 떨어진 열매들을 모아 만든 염주 하나를 총무스님에게 선물로 받았다. 손으로 많이 매만져야 더욱 깊이가 느껴진다는 말씀은 곧 쉬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씀과 다름없었다. 고인 물이 썩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쉬지 않고 정진하는 자의 인덕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장으로 일주문을 나서며 다짐해 보았다. 죽 한 홉도 감사하고 늘 한걸음 물러서서 살아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