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로 가는 우등고속버스는 수학여행 버스가 연상 될 정도로 승객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단체 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휴게소에 도착해서야 그들이 각기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별개의 학생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경주는 관광도시답게 제법 많은 젊은이들이 배낭을 둘러멘 채 터미널 주변을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터미널 앞 승강장에서 모량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하면서 갑자기 여행의‘들뜸’과‘설렘’에서 멀어진 느낌을 받았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분주했던 학생들의 활기와 떨어져 혼자가 되었기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개울을 따라 걷다가 도라지 밭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허리 높이 이상 자란 도라지 줄기들은 보라색과 하얀색 꽃들을 달고 있었다. 카메라를 꺼내자 아주머니가 그러셨다. 며칠 전, 활짝 피었을 때 왔어야 한다고. 지금은 꽃이 시들어가고 있다며 나보다 더 아쉬워하시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 아주머니가 더 예쁘세요.”사진 몇 장 찍자고 사탕발림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외지인의 카메라 앞에서 의연한 미소를 잃지 않으시는 아주머니는 노동의 귀한 가치를 당당하게 보여주고 계셨고 길을 묻는 여행자에게 법흥사로 가는 길도 친절히 알려주셨다. 아주머니는 푸른 벼들이 자라고 있는 농로를 가리켰고 ㄱ자로 꺾어진 농로 끝에 법흥사 지붕이보였다.
투박하지 않은 돌들이 가지런히 박힌 토담은, 끝나지 않은 7월 장마에도 불구하고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토담 위에 올린 기왓장 사이로 들풀들이 자라고 있었고 오랜 시간 비바람에 탈색된 나무 대문이 비거덕거리며 손님을 맞았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것은‘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흰둥이였다. 커다란 덩치로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모습이 자칫 무료해지기 쉬운 오후 시간을 들썩들썩깨우고다니는것같았다.
법당 안에는 절을 창건하신 법광 스님과, 법광 스님이 존경했다는 법흥왕의 영정이 나란히 모셔져 있었다. 반야는 여전히 마당의 석등과 불탑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었고 잠시 흐려진 하늘이 검게 변하기도 했다.
법흥사는 1942년에 법광 스님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역사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절을 창건하신 법광 스님의 남다른 애착과 사연이 깃든 사찰이다. 경주가 고향이셨던 법광 스님은, 신라시대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법흥왕을 기리기 위해 법흥사라는 이름으로 절을 창건하신 후,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에서 정진하며 설법하셨다. 새벽 3시의 예불을 거른 적이 없으며 추운 겨울에도 찬물에 세수를 하시며 새벽 공양 때까지 늘 경전을 읽으셨다고 한다.
지금의 주지이신 혜원 스님은 그런 노스님이 팔십오 세의 나이로 입적하실 때까지 공양주를 하며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셨다. 혜원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늘 검소하시고 책을 가까이하셨던 법광 스님은 신도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법흥사 바로 옆에서 행해진 다비식때는, 많은 신도들이 하늘로 치솟는 불길 속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형상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산 중턱에 세워진 산신각과, 법당 이전을 계획하고 터를 닦아 놓은 부지를 둘러보고 돌아오니 차실 마루에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자연미가 유지된 정원에서 수국이 풍성하게 피어나고 조용한 절간에 살랑 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한 과일 몇 조각이 한여름의 더위를 잊게 만드는 가운데 수행하기 참 좋은 도량이라는 주지 스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