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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겁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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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박동식 2026년 09월 535호
산청 겁외사  전경 산청 겁외사

자꾸만 에어컨 버튼으로 손이 향했다. 2단으로 올리고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고 냉기 출구를 모두 운전석으로 향해도 가슴 언저리에 꽂히는 뙤약볕은 좀처럼 식을 기미가 없었다. 에어컨이 고장 났거나 드디어 여름이 미치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서울에서 산청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네 곳이나 공사 중이었다. 곳곳에서 퇴근 시간의 시내 도로처럼 정체가 빚어졌고 덕분에 산청에는 예상 시간을 몇 시간이나 넘겨서 도착했다.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도 주차장 맞은편에는 아주머니들 몇이 농산물 행상을 하고 있었다. 하루 벌이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라 가방을 들고 내리는 나를 바라보는 아주머니들은 조금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호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안더우세요?”
“더워도 어쩌겠어요, 여름인데. 또 뜨거워야 농사도 잘 되죠.”
에어컨을 틀어놓은 차 안에 앉아서도 투덜거렸던 자신을 생각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것이고, 여름이니 더운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좀 더 긍정적인 사고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외사에는 일주문이 없었다. 커다란 누각을 받치는 열여덟 개의 돌기둥이 출입문이었다. 성철(性澈;1912~1993) 스님의 생가 터에 자리한 겁외사. 누각 밑을 지나 넓은 마당으로 들어서자 정면에는 성철 스님의 사리가 봉안된 동상이 자리하고 있었고 좌측으로 대웅전이 보였다. 고찰이 아니기에 고풍스런 감동은 없었지만 성철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흔적들이다.
동상 뒤로는 성철 스님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었다.
스님은 이곳을 떠나 출가한 후, 한 번도 집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아들의 안부가 궁금해 산으로 찾아온 어머니에게, 멀리서 돌을 던지며 발길을 돌리도록 했다고 한다.“ 내가 보는 것은 돈으로 가치를 칠 수 없는 좋은 길인데 이 조그만 10원짜리 (세상의) 가치가 눈에 띄겠냐”고 하셨지만 모질게 마음먹지 않고 속세의 연緣을 끊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복원된 생가의 유품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속인 이영주에서 입적하실 때까지의 흔적들이 궤적처럼 남겨져 있었고 40년을 넘게 입으신 누더기 가사가 스님의 검소한 삶을 대변하고 있었다. 살아계실때 자신을 찾아오는 중생들에게 나를 찾아오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라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삼천 배를 올리라던 말씀. 그 울림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안채에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활하실 때의 방 모습을 재현하고 직접 사용하시던 의자, 책상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안경과 필기구와 죽비가 수행과 정진에만 매진하
시던 큰스님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특히 벽에 걸린 흑백 석굴암 사진은 세월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덧씌워진 것으로, 스님께서 늘 바라보시던 사진이라고 했다.
잠시 잠잠하던 마당에 한 무리의 참배객이 들어와 스님의 흔적들을 찬찬히 살피고 더듬었다. 아마도 오늘의 마지막 방문자 들일 것이다. 한국불교의 정신적지주로서 이 시대 부처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성철 스님은,“ 참선 잘하라”는 말씀을 남기고 열반에 드셨지만 그 가르침과 정신만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시간 밖에 있는 절’이라는 뜻을 가진 겁외사. 돌기둥 출입구를 빠져나올 때, 노을이 영글기도 전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행상을 하시던 아주머니들은 서둘러 짐을 꾸렸고 하늘은 곧 모든 것이 아련해질 가을이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