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호미곶 2000년 1월 1일을 나는 라오스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맞이했었다. 세상은 밀레니엄이라며 무척이나 떠들썩 했었고 사람들도 그 어느 해보다 벅찬 가슴으로 새해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머물고 있던 라오스의 시골 마을은 그 어떤 요동도 없었다. 밤이 되었는데도 그 흔한 반짝이 조명하나 밝힌 곳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가게들도 모두 일상적인 영업시간이 지나자 문을 닫아버렸다.
그들에게는 1월 1일도 해가 뜨고 지는 수많은 일상의 나날 중 하루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실 사람들의 요동과 관계없이 해는 늘 같은 자리에 있을 뿐이다. 오로지 지구가 스스로 돌며 밤과 낮을 만들고 해 주변을 맴돌며 계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호들갑스런 날이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하지만 늘 나약한 의지를 갖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런 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날, 새로운 해. 그것을 빙자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흐트러진 의지들을 다시 다독일 수 있을 것이며 떠오르는 해를 보기위해 가족이나 연인의 손을 잡고 바다로 달려갈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일 것이다.
해맞이를 할 수 있는 곳은 동해에서 너무도 많다. 바다가 보이는 모든 곳이 해맞이 장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왕이면 최동단으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최동단이니 해도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닮은 한반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호미곶.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가 뜨기 전 아직은 회색빛 하늘 밑으로 어두운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고 바다에서 육중하게 솟아난 오른손은 무엇인가 갈망하듯 약간 움츠린 모양새였다. 파도는 잔잔했지만 뱃사공의 물질 소리를 닮은 파도 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다. 그리고 무대의 장막 뒤에서 조명이 밝혀질 때처럼 구름의 어느 부분이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붉은 빛이 점점 밝아져 노랗게 변하는 사이 주변 하늘이 뒤늦게 붉어졌고 끝내 동쪽 하늘 전체가 활활 타오르고 말았다. 하늘빛을 고스란히 받아낸 바다 마저도 포도주 빛깔로 물들면서 일출의 화려한 몸단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독 밝은 구름장막 어느 곳에서 붉은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은 아니었지만 현란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숨 가쁜 일출의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구름이 많은 날이 아니었음에도 아주 잠시 모습을 드러낸 태양은 다시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고 이후 하늘은 빠른 속도로 맑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말하지 못한 소원이라도 있는 것처럼 바다를 떠나지 못한채 밝아지는 동쪽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고 그 사이 새로운 날은 완전히 자신의 빛을 찾아갔다.
바다속에서 솟아 있는 손 모양의 형상물은 맞은편 육지의 광장에도 하나가 더 있다. 물속의 것은 오른손이지만 육지의 것은 왼손이다. 전쟁과 갈등의 시대를 접고 온 인류가 서로 화합하고 화해하는 상생의 시대를 기원하는 의미다. 형상물 앞에는 세개의 불씨함을 만들었다. 변산반도에서 채취한 20세기 마지막 불씨와 새천년 호미곶에서 채취한 불씨, 남태평양피지와 독도에서 채취한 불씨를 함께 담은 불씨함이 그것이다.
날이 완전히 밝아진 다음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휘어지는 도로는 잠시 어지럼증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득한 동해를 감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길이었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차를 남쪽으로 몰았고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무리 지어 날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푸르러진 하늘을 보며 우리의 1년이 의미 있기를 기원해 보았다. □
박동식님은 외로움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삶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믿고 있으며, 글과 사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길 원하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