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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명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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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박동식 2026년 09월 535호
주지스님 부산 명지사

이른 새벽, 취재를 떠나기 위해 대문을 나서다가 손바닥에서 쩍 하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랐다. 삼각대를 든 손바닥이 순식간에 쇳덩이에 달라붙은 것이다. 카메라 가방에 넣어두었던 장갑을 서둘러 꺼내 끼고는 종종 걸음을 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골목 끝까지 내려앉은 차가운 공기를 헤집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부산은 그래도 포근하겠지?
KTX 덕분에 서울과 부산은 버스를 타고 충청도에 가는 것만큼이나 가까워졌다. 막바지 출근 시간에 다 다른 부산의 아침 공기는 서울에 비하면 매우 포근한 편이었다. 구포역 대합실 밖에서는 손님을 호객하는 택시기사들로 잠시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들을 외면하고 큰길로 나갔다. 어차피 택시를 탈 것이기는 했지만 우선 낙동강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언제나 그렇듯 장엄하고도 유유했다.

내가 처음 낙동강을 본 것은 군대를 막 제대한 무렵이었다. 끝도 없이 방황하던 청춘은 설익은 삶을 탓했고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지친 영혼 하나기댈 곳이 없어서 결국은 서울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내려왔고 사상공단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애써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 시절 자취방에서 5분 거리의 낙동강은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세월은 무심히도 흘렀고 불혹을 넘기고 다시 선 낙동강은 언제나처럼 드넓기만 했다.

택시는 명지사가 있는 상가 바로 앞 횡단보도에서 정차했다. 학원과 카페 광고가 다닥다닥 붙은 계단을 오르자 마지막 4층에 명지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1999년에 개원한 후 2000년 10월 정식으로 해인사 말사로 등록한 포교원이다. 의외로 법당은 넓었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모든 창이 나무로 되어 있었고 천장의 연등불이 은은해서, 마치 아주 짧은 순간에 피안의 세계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명지사는 매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2시까지 이어지는 기도 시간이면 꼬박꼬박 20~30명의 신도들이 참석을 하는 기도도량이다.
“사월 초파일이면 관내 저소득층 120여 세대에 쌀 공양을 합니다. 초파일수익금으로 장학금도 전달하고요. 2006년에는 70세 이상 노인에게 영정 사진을 찍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주지이신 광진 스님은 이웃사랑이 곧 포교요, 용맹정진의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불자를 기다리는 산속의 절이 아니라 포교를 위해 도심으로 나온 주지 스님의 말씀이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명지사는 모든 재정과 운영, 법회등을 신도회에서도 맡아 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한 가족처럼 믿고 의지하며 지내는 것이 특징이다.

법당 뒤는 ㄱ자로 꺾어진 형상이었고 그 맞은편에 천불전이 모셔져 있었다. 깨달은 자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고스란히 간직한 천불상. 청명하면서도 심오한 진리가 도심 한복판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법당에서 연신 절을 올리는 보살님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거대한 낙동강도 황지연못이라는 강원도 태백의 작은 못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학자들이 이어진 물줄기를 연구하기 전에는 과연 누가 그 작은 연못이 1300리 길을 달려 장구한 낙동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는가. 시작은 늘 작고 약할지라도 멈추지 않으면 큰 결실을 맺는법.
작은 발걸음으로 시작한 명지사는 이미, 세상을 정화하고 어두운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어 도심 속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 멈추지 않고 오래오래 흐른다면 낙동강의 물줄기처럼 언젠가는 장엄하고 더욱 깊어질 것이다. 낙동강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때 명지사도 세상의 지친자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되어 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