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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금대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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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박동식 2026년 09월 535호
함양 금대암

농로처럼 시멘트로 포장된 샛길 앞에 금대암 이정표가 있었다. 샛길이라고는 하지만 언덕으로 이어진 비탈길이었다. 길은 올라갈수록 경사가 심해졌다. 차가 멈추었다가는 도저히 다시 출발하지 못할 것 같았고 어느 순간에는 차가 뒤로 밀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넓지도 않은 길이었기에 내려오는 차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돌다 보니 산 아래풍경은 저만치 멀어지고 하늘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급회전 구간을 돌면서 맞은편 창암산 밑자락 군자리 마을이 한눈에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다랭이논이었다. 마침 모처럼 만난 평지(?)였기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수십 계단 층층이 이어진 다랭이 논은 튼튼한 석축으로 쌓여 있어서 공고함은 물론이고 세월의 깊이와 미적 감각도 탁월했다. 이제 막 모내기가 시작된 논에서 허리 굽혀 일하는 농부들이 점처럼 보이는 것을 보면 다랭이논이라고 해도 규모는 제법 큰 모양이었다.

금대암은 금대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금대산이 해발 847m이고 금대암이 해발 700m이니 정상이 코앞인 셈이다.
656년(신라 태종무열왕 3)에 행우行宇가 창건하였고 도선(827~898)이 나한전을 지어 중창한 뒤 나한도량으로 이름이 났었다. 이후 천태종 판사도대선사 행호行乎에 의해 다시 한 번 중창되었다. 그러나6·25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고 이후 금대암 복구기성회가 중건했다. 현재 유물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동종과 신중탱화등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예부터 귀하고 높은 것에는‘금金’자를 붙였다. 금당金堂, 금강좌金剛座, 금각金閣, 금강계金剛戒등이 모두 그런 단어들일 것이다. 금대암 절간 마당에서고 보니 이곳에도 금金자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맞은편 하늘 가득히 최고의 명산 지리산이 거침없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좌로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영신봉, 칠선봉까지 어느 것 하나 가릴 것 없이 당당한 모습이었다. 보란 듯이 도열한 능선들은 마치 늠름한 체구를 자랑하는 운동선수들의 행렬 같기도 했다.

“6월 말이나 7월 초가 되면 운해雲海가 지리산 백리길을 넘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1년중에 가장 절경이죠.”

주지이신 환암 스님의 말씀이다. 정남향 절간에서 새벽을 맞이하는 초여름의 어느 날, 백리에 이르는 거대한 능선을 타고 넘어오는 운해란 어떤 것일까. 진주와 하동, 구례에서 생성된 물 기운이 산을 오르며 더욱 강해지고, 결국 그 힘으로 걸어서도 몇 날이 걸리는 긴 능선을 넘는 낮은 구름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턱하니 막혀왔다.

환암 스님의 안내로 절간을 돌아보았다. 지리산에 지지 않겠다는 듯 청명한 보랏빛 붓꽃이 길게 늘어서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법당 앞에는 연초록에서 하얗게 탈바꿈한 불두화가 풍성했다. 여기에 법당 꽃문살까지 합세하니 금대암은 온통 꽃천지가 되고 말았다.

“육신통六神通중에 모든 것을 얻고도 번뇌를 끊는 누진통漏盡通을 얻지 못하면 앞서 얻은 것들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금대암에서 7년 넘게 살아보니 이곳에서는 누진통도 절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지리산 능선 위의 하늘이 조금 흐려지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그러려니 했는데 스님은 내일 비가 오려는 징조라고 했다. 봄가뭄으로 말랐던 산 아래 엄천강도 곧 생명으로 가득해질 것이고 사람들은 잊었던 계절을 고마워할 것이다.
그때 우리들의 가슴도 금대암의 꽃들처럼 혹은 지리산을 넘는 운해처럼 번뇌를 벗고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