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영지갤러리

산청 정취암

다음 게시물 이전 게시물
영지 影池 - 박동식 2026년 09월 535호
산청정취암 산청 정취암


구불구불 이어진 임도를 오르면서 정취암 바위굴에 살았다던 꼬리 아홉의 여우에 대해서 생각했다. 매년 섣달 그믐밤이면 사람을 홀려서 한 명씩 죽였다던 여우. 어쩔 수 없이 정취암에 머물던 스님들은 섣달 그믐만 되면 인근 마을로 피신을 가야 했고 이에 문가학이라는 선비가 손수 여우를 잡겠다고 나섰단다.
담력과 문무를 겸비한 문가학은 섣달 그믐날 한 말의 술을 짊어지고 정취암으로 올라갔고, 이경이 지나고 삼경이 깊어갈 무렵 한 여인이 나타나 문밖을 기웃거렸다. 문가학은 침착하고 담대하게 안으로 들어올 것을 청한 후 술을 권했다. 술이 바닥날 즈음 취한 여인이 비스듬히 기대어 잠든 모습을 보니 꼬리 아홉의 구미호였단다.
문가학은 미리 준비한 끈으로 여우의 손과 발을 묶었고 깜짝 놀라 깨어난 여우는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자기에게 둔갑술 비결이 적혀 있는 책이 있으니 살려주면 그것을 주겠노라 제안했다. 책을 먼저 확인한 후 사실과 다르지 않다면 살려주겠다고 약속한 문가학은 둔갑술 비법이 적힌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마지막 한 장을 남겨두었을때 몰래 결박을 푼 여우가 책을 낚아채어 굴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문가학은 책의 비법대로 둔갑술을 부려보았으나 둔갑이 온전치 않아 옷고름만은 감출 수 없었다. 그 후 과거에 급제한 문가학은 벼슬을 하면서 둔갑술을 이용해 궁중의 은자銀子를 빼내어 거사 자금으로 쓰다가 발각되어 역모죄로 참수 되었다고한다.

정취암은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고려 공민왕 3년에 화경, 경신 두 거사가 중건한 후 어부에 봉안되어 있던 정취보살상을 이곳으로 이운하였다고 한다. 정취암은 현재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한국 유일의 사찰이며 여우와 관련한 전설은 문가학이라는 실존인물과 개혁 의지가 강했던 공민왕의 역사적 사실들과 맞물려 꽤나 사실성 강한 설화로 전해 오고있다. 하지만 정취암은 꼬리 아홉의 여우는 새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절벽에 크고 작은 바위를 차곡차곡 쌓아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원통보전과 요사채, 응진전, 삼성각 등을 지어 올렸다. 멀찍이서 보면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이지만 법당 마당에 서면 세상이 모두 내 것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창건 이래 고승납자들의 요결처가 되었으며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신 고암 대종사와 성철 대종사께서도 한때 주석하시며 정진하셨던 곳이다.

그러나 정취암에는 구미호 못지않게 무서운 녀석이 한 마리 살고 있었다. 사자의 갈기를 빼닮은 중국산 차우차우가 바로 주인공.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만으로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녀석은 한 가롭게 낮잠을 자고 있었지만 나는 괜히 놈의 눈치만 보며 살살 피해 다녔다. 사람을 반기는 기색도 없는 거만한 녀석의 태도에 기가 눌려버린 것이다. 공양보살님이 내오신 수박을 먹으면서도 공양보살님을 방패 삼아 앉아 있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달구어진 여름 입맛을 수박으로 달랜 후 응진전 측면의 산죽 숲을 올랐다. 정취암을 끌어안은 대성산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불과 몇 분 만에 탁 트인 전망의 바위 암벽을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과 반은 죽고 반은 살아남은 소나무. 바위 암벽 바로 밑으로는 정취암이 자리하고 있었고 점점 멀어지는 시선은 산 아래 신등면까지 이어졌다. 비로소 예부터 이곳을 소금강小金剛이라 일컬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발 아래서 불어오는 정취암 풍경 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앉아 있다 산길을 내려왔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여우도 절경은 알아보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