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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선의 실천 도량 축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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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축서사鷲棲寺, 절집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독수리 축(鷲,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영축산을 본따 ‘축’으로 읽는데 ‘취’라고도 읽음), 깃들 서捿, 즉, ‘독수리가 사는 절집’이란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상징한다. 지혜는 바로 문수보살님을 뜻하므로 축서사는 문수성지이며 참선수행 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경인년 새해, 축서사로 가는 길은 연초에 내린 폭설이 그대로 얼어붙어 하얀 세상이다. 눈 덮인 산길로 접어들면서 절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잠시, 절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주차장까지 말끔히 치워져 있다. 절마당의 쌓인 눈 위로 미끄러지며 달려오는 매서운 눈바람의 반갑지 않은 마중을 받는 순간, 탄성과 함께 안목 없는 눈에도 ‘이런 곳이 바로 명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친다. 확 트인 시야와 발아래 펼쳐지는 수려한 산세의 장중함이 동공을 멈추게 한다. 굽이굽이 파도치는 태백산 능선을 독수리 날개로 품어, 문수산 중턱에 조용히 내려 앉아 쉬고 있는 듯한 절집이다. 운무 덮인 여름이라면, 구름 위를 걷는 신선이 된 기분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으리라.

태백산 줄기를 감고 돌아 문수산 중턱에 자리 잡은 축서사는 신라 문무왕 13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휘황찬란한 광채를 발산하는 불상 앞에서 절을 하던 동자가 어느 날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진 후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들은 의상대사가 불상 모실 곳을 찾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3년 후 의상대사는 인근에 대찰인 부석사를 세우게 되니, 이 연유로 축서사가 부석사의 큰집이라 불리고 있다. 고려 중기에는 건물이 30여동, 대중이 200여명으로 공양을 하기 위해 쌀을 씻었던 뜨물이 10리 까지 흘러갔을 만큼 번창한 절집이었단다.

의상대사의 숨결을 느끼며 세월 속에 켜켜이 쌓여 진하게 묻어나올 천년고찰 축서사는 전란과 왜란을 겪으면서 소멸되어 진한 역사의 향기는 고이 묻혀 있을 뿐이다. 일제 시대 이후 거의 폐사가 되어 숨은 이야기로만 내려오던 의상대사의 숨결을 다시 느끼게 된 것은, 선원장 무여 스님의 중창불사 발원으로 현재의 대가람이 완성되었다. 출가 후 평생을 참선수행에 전념해온 스님은 불사의 중점을 승가와 재가의 수행과 수행 공간 조성에 두었다. 대웅전 위에 자리 잡은 선방의 인상적인 가람배치가 의미하듯 그만큼 수행자를 중요시함이 내포된 것이다. 대웅전 아래 재가자를 위한 열반당과 요사채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축서사는 제방 선원과 달리 5개월 정진과 하루 15시간 이상 참선하는 치열한 수행으로 동안거, 하안거 결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통적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쉬운 마음과 세월의 흔적이 쌓이지 않은 전각의 생경함은 있지만 절집에서 화려함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사리탑의 웅장한 자태는 어느 절집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이 시대 창조적 예술품이다. 대웅전의 단청과 문살 또한 섬세한 문양으로 빼어난 화려함을 자아내고 있다. 하루의 마무리를 알리는 석양이 절집을 붉게 물들이며 소백산 능선으로 내려앉는다. 떠도는 구름들의 신비로운 연출이 하늘 문을 열고 들어선 극락세계를 보여주듯, 시시각각 변해가는 노을의 향연이 화려함의 절정을 이룬다. 이토록 빼어난 절집의 화려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무여 스님은 출타 중이시다. 우리 문화재의 지킴이 역할과 더불어, 이 시대의 문화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는 무여 스님의 염원이 담겨 있음이 아닐는지? 감히 큰스님의 의중을 짚어 본다. 돌아오는 중에, “큰스님의 원력으로 일으킨 불사가 큰스님 영향 아래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닌, 영원히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절집이 되길 서원한다”는, 시자 스님의 말씀이 긴 여운으로 남아 귓전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