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영지갤러리

한국불교의 심장 해인총림 소림선원

다음 게시물 이전 게시물
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가야산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장엄한 풍광을 뿜어낸다. 겨울이 내려앉은 홍류동은 눈이 시리도록 희고 또 푸르다. 계절이 건넨 하얀 선물로 계곡을 덮은 설화의 매혹적인 자태가 눈부시다. 장승처럼 꿋꿋이 서서 가야산을 지키는 노송도 푸른빛의 당당한 기세를 잃지 않은 변함없는 모습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갔을 고승들의 기개가 이러했을 것이리라. 하얀 겨울을 이고 선 노송에서 뿜어 나오는 청량한 겨울향기가 가슴속 티끌까지 씻어낸다.

호방하고 거침없다는 해인사 가풍을 대변하듯 일주문에 곧게 치솟은 천년 노목도 한겨울의 칼바람에 맞서며 당당히 침묵의 수행을 이어간다. 해인총림은 한국 불교 최고의 수행도량이자 조계종 종정이 주석하고 있는 선승의 산실이다. 용성, 효봉, 고암, 자운, 성철, 일타, 청담, 혜암, 법전 스님 등 걸출한 선승들이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구도심으로 수행한 곳이다. 선승의 혼과 체취가 살아 숨 쉬는 한국 불교의 심장이자 두뇌이다.

수행납자는 우기를 피해 정사에 머물며 수행했던 부처님의 전통을 이어받아 여름과 겨울, 3개월씩 산문 출입을 금하고 안거에 들어간다. 안거에는 하루 10시간 이상 정진하지만 하안거와 동안거, 반 살림 기간 일주일은 용맹정진을 실시한다. 용맹정진이란 주야로 한숨도 자지 않고, 눕지도 않고 좌선으로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다. 해인사에서 가장 엄격히 지키고 있는 용맹정진은 수행 납자뿐만 아니라 강원, 율원 등 사중에 있는 대부분의 스님들이 의무적으로 동참한다. 안거에는 면벽 좌선하지만 용맹정진 기간에는 마주보며 정진한다. 매우 엄격한 선원규칙과 초인적 인내를 요구하는 일정에는 어떠한 예외도 적용되지 않는다. 50분 좌선하고 10분간 포행 한다. 좌선시간 죽비 후, 5분 초과 시는 서서 정진해야 하며, 20분 초과 시는 퇴방으로 해인총림 산중을 떠나야 한다. 용맹정진 일주일 동안 절대 누울 수 없으며, 벽에 기대어 앉아서도 안 된다. 지정된 공간을 벗어나선 안 되며, 공양시간과 청소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앉아서 좌선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정신력과 육체의 잠재력에 도전하는 경인년 동안거 용맹정진 일정이다.
오전 12:00 : 좌선
3:00 : 예불. 좌선
5:30 : 행선. 조공
7:00 : 좌선
10:30 : 행선. 오공
오후 12:00 : 좌선
4:00 : 청소. 약석
6:00 : 예불. 좌선
11:30 : 죽 공양
경인년 음력 12월 1일부터 81명의 스님이 자신과의 치열한 내면의 전쟁을 치룬지 6일째이다. 8일 새벽 3시에 방선이다.

나목의 그림자만 길게 드러누운 소림선원으로 가는 길, 눈 속에 묻힌 산죽이 삐죽이 내민 고개위로 찬바람만 묻어나는 한적한 길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 없는 길이 시작 되고 있다. 바람 소리조차 삼켜버린 고요와 적막에 둘러싸인 심사굴 앞에 선다. 세상의 잣대는 꺾어 던져버린 해인총림 소림선원이다.
문을 열어 주시는 스님 뒤를 따라 마루에 올라섰으나 발이 선방 문턱을 넘어가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진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장엄한 광경에 확대된 동공이 멈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켜 쥔, 의심 덩어리로 은산철벽을 무너뜨릴 기세다. 열린 문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 선방의 뜨거운 열기에 압도 되어 모든 생각이 끊어져 버린 느낌이다. 스님의 재촉에 겨우 발을 옮긴다. 문 닫는 소리, 발자국 소리에도 미동도 없다. 내 숨소리 한 점도 부담스러운 우레 같은 침묵이 깔린 공간이다.
장군죽비를 어깨에 메고 무언의 경책을 내리는 종정스님의 위엄이 구도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지핀다. 불생불멸의 자리인 본래의 나를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의 현장이다. 고요와 적막이 두껍게 내려앉은 소리 없는 전쟁터다. “밥값 내 놓으라”는 성철스님의 추상같은 불호령이 총알처럼 귀에 꽂힌다.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침묵의 메아리가 가슴 밑바닥까지 진동시킨다. 구석에서 얼어붙었던 몸이 선방 가득한 수행의 향기에 묻혀 서서히 풀려난다.
심사굴을 투과하던 바람이 마당 한자리를 차지한다. 한켜 한켜 가슴에서 덜어낸 욕망을 바랑 속에 챙겨 넣어 바람에 실어 보낸다. 심사굴에 피고 있는 진리의 꽃, 그 진한 향은 이미 가야산을 넘어 홍류동 계곡을 타고 세상을 향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