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읽어 가야하는 길, 꾸미지 않는 자연의 질서가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속세와 끊어진 아득한 신비속의 산사, 딱따구리 죽비 소리가 무지와 미망을 깨우는 선불교의 도도한 전통이 거침없이 흐른다. 일반인은 물론 신도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하여 굳게 닫힌 산문이다. 일 년에 단 한번 세상과 호흡하지만 욕심을 털어낸 산새들은 자유롭게 산문을 넘나든다. 호기심 가득한 산사의 빗장이 열리고 산문 사이로 세상과 말을 건네는 단 하루는 부처님 오신 날이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희양산 숲 속에 숨은 듯, 안겨 있는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지증국사는 “산이 병풍처럼 사방으로 둘러쳐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고 경탄하며,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봉암사를 찾았다고 한다.
천년 세월을 품고 성쇠를 거듭하며 선맥을 이어온 봉암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본산이다. 1947년 성철스님과 청담, 자운, 우봉 스님이 봉암사 결사를 조직하고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처님 법대로만 한번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했던 도량이다. 부처님 당시의 생활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18개 조항으로 정리된 공주규약을 제정하고, 계율엄수, 사견 배제, 노동의 의무, 자급자족 생활 등을 실천했다. 절대 진리의 참다운 불교를 세워야 한다는 서릿발 같았던 그 강력한 외침은 한국불교사에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었다. 그 뜨거운 역사의 장은 6.25로 인해 3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결사에 동참한 스님 중, 4명의 종정과 6명의 총무원장이 배출되었다. 사찰 운영과 수행풍토를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치열하게 정진했던 봉암사 결사는 오늘날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둥이자 자존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참선수행의 대명사인 봉암사는 조계종 종립 특별 수행도량으로 여느 사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가풍을 지니고 있다. 일 년, 364일 침묵 속에 잠긴 채, 법회를 열지도 않으며, 신도를 들이지도 않는다. 수행자들은 개인 시간도, 공간도 가지지 않고 엄격한 선원 청규에 따라 철저한 공동체 생활을 한다.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란 정신으로 수행과 울력을 병행하며 씨를 뿌려 채소를 가꾸고, 콩을 거두어 메주를 쑤고 장을 담는다. 전문가의 손이 필요하지 않는 도량 안 밖의 모든 일도 울력으로 해결한다. 사미승이든 총무원장을 지낸 스님이든 선방에 입방하면 모두 똑같은 공동체 수좌생활로 돌아온다.
봉암사 경내 60명의 스님이 태고선원, 성적당, 관음전 등에서 동안거 중이다. 성적당에서는 가행정진으로 하루 14시간, 태고선원에서는 10시간씩 정진한다. 주지스님이나 후원 살림을 맡은 소임 스님들도 하루 8시간씩 정진하는 도량 전체가 선방이다. 30명의 스님은 결제와 산철을 구별하지 않고 1년 내내 수행에 전념한다.
흐르는 물을 베개 삼아 정진하라는 침류교의 의미를 새기며, 오직 깨달음에만 전념하는 스님들의 수행의지는 태고선원을 지키고선 희양산 바위만큼 굳세다.
공양간 부뚜막에 올라 앉아 가마솥 설거지에 열중인 스님의 모습에서 진한 수행의 향기가 전해온다. 가마솥 아래 아궁이엔 잿더미가 수북하다. 장작불로 밥을 짓는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 귀에서 눈으로 전해지는 순간이다. 처마 끝에 널어놓은 메주, 집채만큼 쌓아올린 장작더미, 지붕에 빼곡히 매달린 시래기도 묵언 수행중이다.
목탁소리 없는 봉암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깊은 침묵이다. 입선 죽비 소리에 인적이 끊긴 산사는 풍경에 걸린 바람 한 점도 숨죽이며 지난다.
정말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곳, 하지만 가슴속 그리움으로 남겨 두는 것이 진정 봉암사를 사랑하는 마음이며, 수행과 자연의 질서를 지켜온 분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다.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을 서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