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암은 고려 충혜왕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나, 50여 년간 극락암을 지키며 모든 중창 불사를 주관해온 선원장 명정스님은 “땅만 파면 신라시대 와당이 ‘나 여기 있소’하고 무수히 나왔는데 고려 창건기는 허구야”라고 하신다.
명정스님은 20년 동안 경봉선사를 곁에서 시봉한 효상좌이다. “노장이 불국사에서 6개월 전에 설법하셨던 법문을 적어 오라고 하셨어. 어렵지만 그대로 써서 드렸거든, 그 일이 시초가 되어 노장님 곁에서 걸망지고 다니는 일등 수좌로 글쟁이가 되어, 타락 아닌 타락을 하게 되었지.”라고 하시는 스님의 얼굴에서 영축산 천진불의 미소가 피어오른다.
입승 스님께 방문을 잠그라고 하시더니, 열쇠 꾸러미를 찾아 벽장에서 꺼내온 보따리를 풀어 놓으신다. 용성, 한암, 만공, 탄허, 만해, 춘성, 성철, 향곡, 석우스님등 경봉선사가 당대의 선지식들과 깨달음의 경지를 겨뤘던 법거량, 주고받은 선문답, 일생동안 쓴 일기, 사진 등 보물처럼 간직한 스승의 유필이다. 순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감동과 온 몸에서 느껴지는 전율이 교차한다. 한자리 앉아서 기라성 같은 선승의 숨결과 손길이 농축된 수많은 문자사리를 한꺼번에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스님은 스승의 방대한 유필을 모아 ‘경봉스님 말씀’ ‘삼소굴 소식’ ‘경봉일지’ 등을 펴냄으로 스승의 뜻을 기리고 불자들의 마음을 열어 세상을 깨우고 있다.
경봉선사 입적 후 원광재를 지키며 가풍을 이어가는 스님은, 스승을 한시도 잊지 못한 사무친 그리움이 절절하다. “노장님 가신지 벌써 30년이나 되었어. 잠깐 지나간 세월인데, 살아 계시는 것만 같아.” 가느다랗게 떨리는 스님의 음성이 다관 가득 찻잎을 담아 진하게 우려주신 독한 차 맛처럼 가슴을 흠뻑 적신다..
호국선원은 경봉선사가 1928년 조실로 추대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입적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낮에는 설법, 밤에는 용맹정진의 독특하고 힘든 수행으로 “바보가 되거라” “야반삼경에 촛불 춤을 보아라”하며 수좌들의 정진을 독려했다. 경봉선사의 자비가 훈습된 호국선원에는 수행자가 100명 이상 모여들어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선원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호국선원의 정진처는 조사각이다. 삽삼전 현판이 나란히 걸린 조사각은 경봉선사가 부처님과 35분의 역대조사의 진영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전각이다. 조사의 외호를 받으며 치열한 구도심에 불타는 호국선원은 산철없이 춘. 하. 추. 동안거의 사계절 결재를 한다. 매년 25 ~26명의 수행자가 정진하며, 8~10명은 결, 해제 구분 없이 쉼 없는 정진으로 깨달음을 향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다.
조사각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그믐날, 불조의 은혜와 그 뜻을 기리며, 수행정진을 발원하는 삽삼 추모재가 봉행된다. 11월 초하루부터는 경봉선사의 법석이 이어지는 화엄산림법회가 한 달 동안 열리며. 이어서 납월 8일부터 일주일 용맹정진 후, 해제일까지 치열하게 정진한다. 이는 조사의 가르침을 새기며 교에서 선으로 이어진 정진을 깨달음으로서 다시금 선을 꽃피우게 하는 수행과정이다.
삼소굴의 주련은 그 날의 한밤중 소식을 묵언으로 전하고 있다. 좁은 마당으로 뛰쳐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는 선사의 모습이 스친다. 스승의 부름도 거절하고 부처를 찾아 수없이 헤매고 다녔으나, 정작 부처를 만난 곳은 바로, 떠난 이 자리였으니, 어찌 웃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삼소굴 마당춤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3분의 도인이 탄생된다는 이 도량에 다음 두 분 주인공은 어디에 계시는지? 참으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