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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미소, 약수암 죽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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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약수암으로 가는 산모퉁이 길은 참으로 고요하고 평화롭다. 가지 사이에 걸린 햇살을 바라보며 지난 계절 때를 맞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던 나목들, 공간이 적으면 몸을 줄이고 키를 키울 뿐, 햇볕이 적다고 시샘하거나 다투지도 않는다.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섭섭해 하거나 불평 한마디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생명들, 가던 길 멈추고 나도 잠시 그들과 이웃이 되어본다.

비구니 수행처인 약수암은 가야산 해인사의 산내 암자로 구한말, 1904년 흥선대원군의 수양딸인 성주스님이 궁의 지원을 받아 창건하였으며 1927년 도삼스님이 중건하였다.
대나무 숲이 일품인 죽림선원은 약수암 창건시 양철로 지붕을 덮은 선원이 개원되었다. 그 후, 허물어진 선원을 일으키기 위해 비구니 스님들이 탁발을 도모하여 개축하였으며, 1972년 법공스님이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선원을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용조용 걸음을 옮겨온 죽림선원 마당에는 텅 빈 적막만이 댓돌 위를 차지하고 있다. 파아란 하늘 속으로 흐르는 구름 아래, 눈 덮인 가야산의 장엄한 광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수많은 선승의 마음을 다잡고 고삐를 조였을 선방 문고리는 세월의 손길이 쌓여 까아만 빛을 반짝인다. 고요를 깨우고 들어선 선방, 선정에 든 달마대사는 아직도 좌선을 풀지 않고 있다. 깨달음의 바다를 향해 하루 12시간씩 끊임없이 노를 저었던 죽림선원, 잠시 돛을 내린 선방에 다시 고요가 내려앉는다.
해제 3~4일전, 죽비를 내려놓은 스님들은 그동안 사용했던 살림과 자신의 발우, 장삼, 좌복 등을 꺼내 세탁하고 깨끗이 손질하여 다음 철 수행을 미리 준비한다. 벽장 속, 가지런하게 정돈된 좌복에서 비구니 스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해제 날 아침, 요사를 정리한 스님들은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향한다. “제대로 정진한 납자는 해제 후, 만행 길에서 분반좌에 조금도 망설임 없는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이다.” 라는 종정 법전스님의 동안거 해제 법문을 화두에 챙겨 넣고, 안거증을 받아든 스님들은 걸망을 짊어진 채 만행에 나섰다.
석 달간의 안거를 마치고 산문을 나서는 스님들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면서 세상과 만나는 운수행각의 설렘과 깨달음의 바다에 온전히 이르지 못한 아쉬움이 교차하는 순간이 아닐까?

가야산 옛 집과 옛 길엔 그 시대를 헤쳐 온 스님들의 삶이 녹아 있다. 약수암의 손맛으로 소문난 공양은 해인사를 거쳐 간 수많은 학승과 불자들 사이에 맛있는 절밥으로 유명한 암자이다. 그것은 오직, 불사를 위한 일념으로 고시생을 모아 하숙을 치며, 20원짜리 밥장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승의 정성과 자비가 농축된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비법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돌위에 놓인 털신 한 켤레, 그 양쪽으로 감원스님과 나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는다. 절집에서만 60평생을 살아오신 약수암의 산증인 노스님이 반겨 주신다.
“기도 회항을 하기 위해, 디딜방아로 하루 종일 쌀을 찧어 만들어 둔 떡도, 고추장 담으려고 쑤어둔 조청도, 큰절 학인 스님들이 몰래 들고 가서 먹어 버렸지만 섭섭함 보다는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랬을까? 하는 측은지심이 앞서 마음이 아팠다”고 하시는 노스님은 아침 대용으로 밀가루 떡을 드시는 자운스님께 음료수 한 병 사드리지 못했던 안타까움과 누더기를 입고 원행을 다녀오시는 법정스님께 식은 밥 한 그릇 건넬 수 없었던 상황이 아직까지 가슴에 절절히 남아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버렸다.

누가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마음만큼 베풀 수 없었던 시절의 향기로운 아픔이 아름다운 흉터로 남은 노스님의 얼굴에서 부처의 미소가 피어나고 있다.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 적으면 적은대로 나누며 거짓 없이, 참! 재미있게 사셨다는 노스님의 하얀 추억 속에서 소박한 행복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하루다.
베푸는 삶이 녹아든 암자이기에 부처의 자비가 언제나 샘물처럼 흐르는 편안함, 약수암의 아름다움은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