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 조사가 천축에서 돌아올 때, 불경을 실은 흰 나귀가 울면서 제자리를 맴돌던 곳에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에서 유래한다.
이후, 혜공왕 12년(776) 진표, 영심 스님의 중창을 거쳐, 고려시대 문종의 다섯째 왕자인 도생 승통이 주지를 지내는 등,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중창을 거듭했다. 조선 중기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으며, 인조 2년(1624) 벽암대사가 중창한 후, 중건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팔상전과 미륵대불로 상징되는 미륵 도량 법주사는, 조선 중기 사찰 중심에 선당(현 궁현당)이 자리해 선찰로서의 역할도 수행해 왔다. 1998년 궁현당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밝혀진 선당은 정유재란으로 모든 당우가 소실된 후, 가장 먼저 복원된 당우이다. 이는 법주사에 부휴 스님 법맥인 벽암각성 스님 등으로 이어진 선풍의 영향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근대에 불교 전문 강원으로 활성화되어 오던 법주사에 선풍을 중흥한 스님은 금오 스님이다. 경허, 만공, 보월 스님의 법맥을 이은 금오 스님은 “첫째도 선, 둘째도 선”이라며 일관되게 참선을 강조하며 엄격한 청규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내를 요구하며 납자들을 제접했다.
“근대적 시설의 대규모 선방을 건립하라”는 금오 스님의 유훈을 이어 받아 맏상좌 월산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향로전을 개조해 1969년 총지선원의 문을 열었다. 평생 참선만을 강조한 금오 스님의 선풍은 월산, 월남, 탄성, 이두, 혜정, 월주 스님 등에 의해 눈 밝은 납자들의 정진 도량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현재 총지선원은 웅장한 산세 속, 넓고 평탄한 뜨락에 총 건평 140평, 정면 12칸, 측면 3칸의 장대한 규모로 큰 학이 날개를 접은 듯 장중하게 앉아 있다.
안거철이면 반야 지혜를 증득할 것을 서원하는 26명의 눈 푸른 납자들이 하루 4차례, 10시간 정진한다. 자유정진 없이, 매주 일요일 아침 대중 울력을 하며, 산문 출입은 물론, 대중생활을 저해하는 행위와 개인차량 운행을 금지하는 엄격한 청규를 적용하고 끊임없는 탁마로 금오 스님의 선풍을 이어가고 있다.
선원장 덕암 스님은 “선이란, 업을 소멸하고 본래의 청정한 자리로 돌아가 진리를 바르게 보는 지혜를 갖추는 것으로, 재가자들은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실천하는데 수행의 참 뜻을 두라”고 하신다. “젊은 시절 사진을 붙여 놓고 늘 초심을 되새기며,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역할로 화합된 수행분위기를 이끌어 가는데 중점을 둔다.”는 선원장 스님의 자상하고 온화한 인품과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머리가 숙여진다.
속세를 떠난 깨달음의 자리에 향기로운 법향으로 피어난 금오 스님의 수행가풍이 고스란히 담긴 총지선원이다. 저 선방에 학 같이 앉아 화두에 목숨 건 수행자의 열기가 산사를 데운다. 적막에 쌓여 고요가 깊게 침잠한 총지선원, 선원장 스님의 뒤를 따라 선방의 고요를 뚫고 발을 묻는다. 가지런히 놓인 좌복 위에 먹물 옷 툭툭 털고 일어선 수행자의 향이 가득하다. 수행의 잔향에 잠시나마 몸과 마음을 적시고 나를 비우고 또 비워내는 마음 목욕으로 내 안에 꼭꼭 숨은 나를 다시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