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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숲 운문사 문수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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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사방으로 흩날리던 짙은 솔 향이 나그네를 반기며 몸과 마음을 적셔준다. 천년의 숨결로 고승대덕을 품은 넉넉함과 침묵을 보듬은 소리 없는 큰 울림이 호거산 메아리로 돌아온다.
낙락장송 구불거리는 우람한 숲길을 따라, 운무 가득한 호거산중 구름문을 열고 들어선다.

신라 진흥왕 560년에 창건된 운문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라는 사명을 내린 사액사찰이다. 원광법사가 대중 교화를 위해 세속오계를 전수한 화랑정신의 발상지이며, 일연스님이 집필한 위대한 문자 사리 삼국유사의 탄생지이다. 현재 국내 비구니 사찰로는 유일하게 선원, 율원, 강원을 모두 갖춘 승가교육의 장으로, 수많은 학승을 배출한 국내 최고의 비구니 도량이다.

솔 향에 맡겼던 몸과 마음을 깨우고 다리를 건너자, 흐트러짐 하나 없는 정갈하고 단아한 선원 분위기에 압도 된다. 깔끔하게 비질된 하얀 마당엔 지나던 햇살도 미끄러져 구름 뒤에 숨었다. 맑은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도량에 세속에서 묻혀온 먼지라도 떨어질까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원응국사 주석 시, 가지산문의 중심선원으로 성장했던 운문사는 설송 연초스님 이래, 선교 양종을 아우르는 수행도량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비구니 납자들의 치열한 수도장인 문수선원은 선교일치 사상의 종풍을 확립하고, 선풍을 드날리던 옛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회주 명성스님의 원력으로 건립되었다. 1999년 시작된 선원불사는 80여 평의 선방과 요사채 등 당우 5채를 신축하였으며, 2003년 하안거에 개원하여, 20명의 납자가 첫 안거에 들었다. 운문사 승가대학이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교敎의 바다라면 문수선원은 부처의 마음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선의 숲(禪林)이라고 한다.

본당과 떨어져 조용하고 한적한 숲속에 위치한 문수선원에서는 25명의 비구니 납자들이하루 10시간 정진으로, 가슴에 맺힌 화두를 풀고자 치열하게 자신을 불사르고 있다. 안거 에 든 납자들은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저녁 10시까지 매일 윤회하듯 반복되는 하루 일과로 일체의 망념을 자르는 지혜의 검을 찾고 있다.
방선이 끝나고, 입선 죽비소리에 눈 푸른 납자들이 서둘러 좌복 위에 오른다. 모든 소리가 절멸된 고요와 적막에 잠긴 선방의 공기는 비장하다. 무거운 침묵 속에 팔만사천의 번뇌와 육근의 무게는 화두일념으로 한 근이 되었다. 마지막 이 한 근마저 놓기 위해 백척간두에서도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수행자의 거룩한 모습이 눈부시다.
 
선원 옆, 언덕위에는 지난겨울 모진 추위를 견디고 피워낸, 코끝을 찌르던 매화가 탐스런 열매를 맺었다. 토실토실 영근 매실을 따느라 손놀림이 분주한 납자의 이마에도 초록 매실이 탱글탱글 맺혀있다. 밀짚모자와 회색 승복, 이마에 맺힌 영롱한 보석에서 배어나오는 수행의 향기가 장엄하도록 아름답다. 수행자의 울력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삶의 방편이 아닌, 수행자의 본래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향이 가득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손길이 닿은 듯, 정원처럼 가꾸어 놓은 야채 밭,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수행자의 마음 밭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세속의 일을 뜬구름처럼 여기고 불문에 들어선 비구니 납자들, 맑고 투명한 얼굴에 청아한 눈빛이 초록 광명으로 나툰다.
승가에선 수행만큼 중요한 것이 울력이다. 제방선원과 달리 문수선원은 자급자족을 통해 일과 수행이 하나임을 보여준다. 선원장 혜은 스님이 내어주신 쑥개떡과 식혜, 점심공양에 올라온 모든 야채의 원산지는 문수선원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선사의 서슬 퍼런 청규가 살아있는 현장이다.

청량한 산사의 솔바람이 옷깃을 여미고, 장독위에 내려앉은 까치들도 수행에 동참중이다.
잠시나마 선의 숲속에 함께한 시간, 따르던 세속의 번뇌들은 노송의 가지에 걸려 흩어졌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나는 선의 숲속에서, 나는 오늘 무엇을 비워내고, 또 무엇을 담을 수 있었을까? 비구니 납자들의 눈망울에 가득한, 그 푸른빛의 청정한 기운이 혼탁한 세상에 맑은 연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선의 숲속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