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영지갤러리

벽안의 향기 향천사 천불선원

다음 게시물 이전 게시물
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속가에서 승가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시내를 벗어나는가? 했더니 어느새 사바세계를 뒤로 하고 선계로 들어서는 산문에 이른다. 고요한 침묵으로 가득한 마당에 아름드리 고목이 겹겹이 눌러 앉은 파란 역사를 지키고 섰다. 깊은 산중에 들어선 느낌의 절집은 담백하고 고졸한 대가람의 옛향을 가득 품고 있다. 초록에 물든 여름 날, 벽안의 향기를 쫓아 푸른 눈의 붓다를 만나러 천불선원으로 건너간다.

충남 예산에 자리한 향천사는 백제의 국운이 다할 무렵인 의자왕 10년(650년) 의각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 조성한 불상을 돌배에 싣고 돌아와 절터를 찾던 의각 스님은 금빛 까마귀 한 쌍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갔더니 향기 나는 샘이 흐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절을 짓고 향천사라 이름 붙였으며 산을 금오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불선원은 1954년 보원 스님이 향천사에 주석하면서 금오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선문을 열었으며 1989년 선원을 정비하여 천불선원으로 개칭하였다. 주로 구참 납자들만 실참하는 도량으로 이름났던 천불선원은 4년 전부터 다국적의 외국인 스님들이 해제와 결제를 거듭하며 수행하고 있다. 매 안거마다 15-20여명의 외국인 스님들이 방부를 들였으나, 올 하안거에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화계사로 떠나고 말레이시아, 폴란드, 체코, 스웨덴에서 온 4명의 스님만 남아서 수행중이다. 지금까지 약 100여명의 외국인 스님이 거쳐 간 천불선원의 하루 일과는 새벽 3시부터 오후 9시까지 제방선원에서 정진하는 한국스님들의 수행과정과 다르지 않다. 하루 4차례 8시간 좌선하며 예불과 울력, 발우공양까지 예외는 없다. 빵과 육식에 익숙한 외국스님들이 밥과 나물만으로 이루어진 사찰음식을 한 톨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수행에 있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정이기에 감내해야 한다.

탁! 탁! 탁! 입승스님의 죽비소리에 파란 눈의 납자들은 자신을 찾는 물음 속으로 잠겨든다. 나는 누구인가? ‘참나’를 찾아 부모 형제 모두 버리고 이역만리 타국 땅, 깊은 산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나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머릿속을 파고드는 온갖 번뇌를 털어내고 끝없는 의심 덩어리에 매달려 나를 찾아 떠나는 길목, 천불선원은 한여름의 무더위에도 냉기가 흐르고 있다.

속가의 형님이 백담사에서 수행중이라는 27세의 폴란드 출신 홍현 스님은 일본에서 출가하여 1년 전 한국으로 왔다. 일본 큰스님에게 받은 ‘무’자 화두를 든다는 홍현 스님, 선방 의자에 꼿꼿이 앉아 정진하는 이색적인 모습에 눈길이 머문다. 아직 좌식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스님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는 그 자체가 고행일 것이다. 한국 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선 숭산 스님은 “진정한 선이란 몸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앉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며 특별한 자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일까? 홍현 스님의 티 없이 맑은 얼굴에 피어난 환한 미소는 집을 떠나 오랜 세월 떠돌다가 고향에 돌아온 듯, 한없는 편안함이 배어난다.


말레이시아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명안 스님은 홍콩에서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명안’이라는 법명을 받고 한국에 온지 15년이 되었다는 스님은 스승인 숭산 스님이 내린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고 있다. 언제까지 한국에 머물 것이냐는 질문에 “오직 모를 뿐, 미래를 생각하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다.” 는 스님은 김치와 오곡밥을 제일 좋아한다며 엄지를 들어 보이신다.
수행 중 머리에 떠오르는 망상을 지우는 것이 가장 어려우며, 육체적으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야 하는 좌선이 힘들다는 스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 위해, 순간순간 나를 버려가고 있을 뿐이라며 환한 미소를 담아 차를 내주신다.

시간이 멈추어진 공간, 파르라니 깍은 머리와 정갈하게 갖춰 입은 먹물 옷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왜, 무엇이? 이 푸른 향기를 예산 산중까지 스스로 스며들게 하였을까?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바람을 따라서도 향기를 풍기고, 바람을 거슬려서도 향기를 풍기고, 바람을 거슬리거나 바람결을 따라서나 언제나 향기를 풍기는 향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지요.” 부처님은 그런 향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셨다. “첫째는 계율(戒香)의 향이고 둘째는 들음(聞香)의 향이고 셋째는 보시(布施香)의 향이니라”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오랫동안 바람을 거스르는 향기를 남겨주실 분은 누구일까? 선방을 나서니 온몸에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것 같다. 오늘 하루 맑고 푸른 벽안의 향기를 가득 묻히고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