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여왕의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 전에 합장하게 했을까? 사찰 이름보다 영국여왕이 찾았던 곳으로 더 알려진 절집, 봉정사에서 봄을 맞은 엘리자베스 여왕은“참 아름다운 사찰로 추억에 길이 남을 것”이라며 감탄했다. 천년 세월을 품은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
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동양의 절집에서 서양의 여왕은 먼 여정의 노곤한 마음을 추슬렀으리라.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봉정사는 의상 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봉황이 날개를 접고 사뿐히 내려 앉은 터에 절을 지었다는 시처럼 아름다운 설화가 전해진다. 천등산이 내어 준 터에 봉황처럼 앉아 있는 봉정사는 의상 대사의 제자 능인 스님이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창건했다.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의 절제된 품위를 간직한 극락전은 국내에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이며,‘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동승’등,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절집이다.
지조암 자리에 비탈진 언덕을 적당히 깎아내리고 석축을 쌓아올려 마당을 넓혔다. 낡은 암자를 보수하여 선방을 신축하고 요사채와 목욕탕도 들였다. 부석사 조실 근일 스님의 친필 휘호로 천등선원 현판을 걸었다. 봉정사의 천등선원이 안동지역 최초의 선원
으로 탄생한 순간이다. 봉정사 주지 겸 선원장 자현스님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으로 2010년 11월 19일(음10/14) 천등선원이 문을 열어 첫 결제에 8명의 납자가 입방하였다. 세번째 동안거를 맞은 올해에도 8명이 결제에 들었으며 티끌만큼의 번뇌도 용납되지 않는 쉼
없는 정진이 이어지고 있다.
천등선원의 입방자격은 비구스님으로 제한하며, 정진 분위기를 위해 사미승의 입방은 허용하지 않는다.
좌선에 들면 2~3시간 연속 정진으로 입선과 방선 죽비만 있을 뿐, 정진 중 포행 시간은 없다. 결제 기간 중, 산문 밖 출입을 일절 금하기 위해 선원 내에 목욕탕까지 마련한 천등선원은 자율정진이나 반철, 대중산행도 없이 오직 정진에만 몰두하는 엄격한 청규를 적용하고 있다. 때문에 공부에 대한 대단한 각오가 서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수행도량이다.
숨소리조차 참아야 할 것 같은 맑은 고요가 포근히 감싼 선방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공간, 무거운
적묵 속에 켜켜이 내려앉은 선기가 혼탁한 속세의 번뇌를 잠재운다.
“수좌는 꼭 주지를 해봐야 하고, 주지는 꼭 선방을 가봐야 한다. 양쪽을 모두 섭렵해 보아야 이해의 폭이 넓어져 시봉을 잘하게 되고 수행자도 그 고마움을 알게 된다”는 은사 근일 스님의 뜻에 따라, 고운사와 부석사에서도 선원을 개원하였던 자현 스님은 공부 도량이 없는 안동 지역에 선원을 개설할 뜻을 세우고 봉정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낮에는 주지로, 아침저녁에는 수좌로,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이판사판’스님이다. 세 차례 100일 용맹정진과 제방의 선원을 두루 거친 스님은 수행도량의 주지로서 납자들을 외호하는 수호자이며 계행에 철저한 율사이기도 하다.
“호리유차毫釐有差하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 털끝만큼 어긋나면 하늘과 땅처럼 갈라진다. 수행에 있어서 조그만 빈틈이라도 생기면 결과는 완전히 엉뚱한 곳에 떨어지게 된다”는 스님은“수행 중 이런저런 경계에 부닥치면 가르침을 잊고 다른 길로 빠지게 되므로 선지식을 찾아 공부 지도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수행자는 돈독한 신심을 지니고 계행에 철저해야 됨”을 강조하신다.
불자들의 참선 자세에 대해서도 조용조용 말씀을 이어가시는 스님의 성품은 인자한 수행자 그 자체이 다.“사교입선은 배운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선에 들어간다는 뜻이지, 교를 버리고 선에 들라는 것이 아니다. 세속에서 배운 유, 무식의 지식을 가지고 참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자신의 알음알이에 화두를 꿰어 맞추고 견주어 보아서는 안된다. 미련하고 무식한 사람이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선이든 염불이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근
기에 따라 수행하는 것은 좋으나 서둘러 빨리 하려는 조급한 마음을 내지 않아야 선에 들어올 수 있다.”
수행과 전법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지탱하는 힘은 쉼 없는 정진으로 대중과 화합하려는 수행의 향이 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승대덕에게서 자연스레 선승의 향이 뿜어져 나오듯이 빨랫줄에 널어놓은 먹물 옷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엄격함이 배어 있다. 수행자의 기상이 성성이 살아 한여름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털끝만큼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불퇴전의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봉황의 화려한 자태에 비해 뽐내거나 거만하지 않고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 청빈함이 느껴지는 절집, 부처의 미소가 숲을 이루는 천등선원에 구경경지의 법열을 만끽하려는 선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