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오는 가을 냄새에 끌려 오대산으로 마중을 나선다. 상원사로 오르는 비포장 길, 흙이 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코로 전해지는 흙냄새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느껴본다. 그 어떤 생명도 거부하지 않고, 고이 품어 경이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흙의 기운에 흡수되
어 고요와 평화 속으로 빠져든다. 자연향이 그리운 나그네들을 위한 절집의 배려가 흠씬 배어나 포근한 정겨움이 가득 담긴 적멸보궁 가는 길이다.
오대산 적멸보궁 상원사는 털끝만큼의 흐트러짐도 없이 학과 같이 고고했던 한암 선사의 수행이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다.“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다”하고 조실자리를 팽개친 올곧은 수행자이며, 한국전쟁 시, 소각의 위기에 처한 상원사를 소신공양의 결의로 자신의 몸을 던져 지켜낸 수호자이다. 좌탈입망으로 스스로 일생의 수행을 점검한 선지식이며, 중생들에게 수행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 한국불교의 자존심이다.
상원사 청량선원의 근원은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왕 2년(1376) 나옹 선사의 제자인 영암 스님이 중창하여 33명의 선객이 10년 정진을 시작하였다.
오대산에서 문수 동자를 만나 병을 치료하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깊은 인연으로 세조의 원찰(1469년)이 된 상원사는 의발과 좌구 등을 하사받아 52명의 선객이 수선에 들었다.
근대에 들어 1907년 수월 스님이 보림에 들었으며, 1921년 하안거에 동산 스님과 동광 스님이 법거량을 나누기도 했다. 1926년 한암 선사가 문수전에서 동구 불출하며 정진하자 전국의 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 북방제일선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암 선사의 문하에서 청량선원을 거쳐 간 스님들은 효봉, 청담, 고암, 서옹, 월하, 탄옹, 보문, 고송, 탄허, 자운, 지월, 석주 스님 등 조계종단의 종정을 역임했거나 수행의 표상으로 한국 현대불교를 지킨 선지식들이다.
1930년대는 백여 명의 납자들이 운집하여 칼잠을 자고 감자밥, 도토리 죽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도 치열하게 정진했다. 1940년 이후에도 매철마다 40~50여명의 납자가 수선 정진하는 규율이 엄한 수행처로 정평이 났으나, 한암 선사 열반 후 쇠락해 1985년 선원 문을 닫게 되었다.
1992년 정념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닫혔던 선문이 다시 열렸으며, 2002년 150평 규모의 선원을 신축하여 문수전에서 독립했다. 한암 선사의 선향이 진하게 남은 청량선원은 수행 환경이 더욱 좋아져 많은 수좌들이 정진하고 싶어하는 선원이 되었다.
초가을 내린 비에 촉촉이 내려앉아 배시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청량선원의 단아한 모습이 또 하나의 자연으로 다가온다. 온 세상을 소리 없이 뒤흔드는 화두로 미로를 찾는 고행의 아픔을 삭이며 좌선에 들었던 납자들은 만행을 떠나고 텅 빈 고요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18명의 스님이 하루 9시간 정진으로 해제 마지막 순간까지 내 안의 나를 찾아 자신을 불태운 선방,‘지허 스님의 선방일기’를 탄생시킨 현장이기도 하다.
“뼈마디가 저려오고 신경이 없는 머리카락과 발톱까지도 고통스럽단다. 수마는 전신의 땀구멍으로 쳐들어온다. 화두는 여우처럼 놀리면서 달아나려 한다. 입맛은 소태 같고 속은 쓰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한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큰 대자로 누우면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만사휴의다….”
한암 선사의 기상과 정신을 되새기며 수행 가풍을 이어가는 인광 스님은 선원을 외호하는 주지로 납자들과 함께 안거에 드는 수행자로 이理와 사事를 겸하고 있다.“수행자란 특정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리이타의 삶을 사는 자체가 수행이므로 재가자도 수
행자이다”라고 하는 스님은“좌복 위에서나 법당에서만 수행자를 찾아서는 안 된다. 붓다는 그러지 않으셨다. 그것은 오히려 불법을 퇴락시키는 것”이므로 수행이란 의미를 정확히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법은 그대로 차별이 없는데 형태에만 집착되어, 그것을 인
식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재가와 승가의 소통도 어려워지는 것이다”라는 스님의 법문에 청량한 바람 한줄기가 내면을 훑고 지나간다.
섬세한 손길과 우아한 품위가 묻어나는 맑고도 정갈한 도량이 스님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합장 반배로 서로 인사를 나누자는 주지스님, 차를 건네는 손길에도 수행의 숨결이 배어 있다. 인품에서 우러나오
는 수행자의 향기가 묘한 감동으로 전해져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숙연함을 감출 수가 없다. 스님의 맑은 미소와 청아한 음성, 간결한 어조로 전해지는 부드럽지만 강렬한 메시지는 모든 생명을 깨우는 상원사 동종소리처럼 긴 여운의 법향으로 가슴 중심에 깊게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