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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향훈, 대원사 동국제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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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 불경을 보니까 아주 마음에 들더라 이거야. 그래서 참선하려고 대원사를 찾아갔지. 그때 대원사 탑전이 참 좋았어. 그래 거기 들어가 좀 있었지. 그런데 주지가 그걸 보고 펄쩍 뛰어. 본시 탑전이란 데가 스님들만 있는 곳이지 속인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한판 했지. 너거 들은 절에서 처자식 거느리고 살림 다 살고 떡 장사도 하지 않느냐. 그러고도 중이냐. 내가 참선공부 한다는데 웬 말이 많노. 절이 불교공부 하는 곳이지 살림 사는 곳이가.” 한국 불교의 걸출한 선승, 성철 스님이 출가하기 전 대원사 탑전에서 스승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체득한 수행 이야기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성철스님이 스무 살 청년시절, 불교에서 진리를 찾고자 속인의 신분으로 탑전에 들어 정진 42일 만에 동정일여의 경지에 들었던 곳으로 유명한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수덕사 견성암 선원, 가지산 석남사 선원과 함께 한국의 3대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꼽히고 있다.

경남 산청군 지리산 계곡에 위치한 대원사는 신라 548년(진흥왕 9년) 연기대사 창건 이후 천여 년 동안 폐사되었으나, 1890년 혜은선사가 중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였다. 혜은선사는 유수한 선객들을 청하여 탑전에서 좌선하고, 큰방에서 경을 강론하며 깨달음과 자비의 법륜을 함께 굴리니 전국의 납자들이 운집하여 대법회를 이루었다고 한다.

1928년 대원사에 서래각 선원이 개설되어 있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기록은 없으며, 구하. 경봉, 향곡. 전강스님 등 한국의 대표적 선지식 중 탑전을 거쳐 가지 않은 스님이 없을 정도로 선원이 융성하여 상판과 하판으로 선방을 나누어 정진할 만큼 대원사 선원의 규모가 컸다고 한다.
거듭된 내란과 전쟁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도량에 지리산 호랑이라 불렸던 법일 스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 이름난 비구니 수행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국을 걸어 다니며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씩 시주받아 맨 먼저 사리전 선원을 신축하고 1959년 좌복을 펼쳐 선방을 개원했다, 선객들로만 도량을 채우기를 서원했던 법일 스님은 청빈한 수행정신과 각고의 노력으로 1986년 선원을 크게 중창하여 대원사에 불조의 혜명을 이어가는 죽비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원사 동국제일선원은 부처님 진신사리 58과가 모셔진 사리탑이 선방 뜰에 자리 잡고 있어 선원 이름을 사리전 또는 탑전이라 하였다. 사리탑은 수많은 세월과 온갖 풍상에도 의연하게 홀로 절터를 지키며 천년고찰의 명맥을 이어온 대원사의 얼굴이기도 하다.
대원사 사리전은 비구니 스님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정진하고 싶어 하는 선방으로 선객들의 발길이 운집하는 곳이다. 대웅전 우측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60여 평 규모의 선방은 외부와 자연스럽게 차단되어 수행공간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선승의 푸른 설법이 구슬처럼 청아한 사리전, 이번 동안거에는 70세 이상 노스님 5분을 포함하여 32명의 선객들이 결제에 들었다.
좌복 위에 앉은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저마다 부여잡은 화두는 각기 다르겠지만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서원하는 결기 어린 푸른 눈빛은 모두가 하나다. 심연의 불꽃을 피우려는 절박감에 몸과 마음을 화두로 동여 메고 수행의 고삐를 다잡는 선객들의 칼날 같은 선기가 탑전으로 뻗치고 있다. 대숲에 일렁이던 바람이 달려와 굳게 닫힌 선방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 없는 무거운 침묵이 천년의 세월보다 더 두껍게 사리전을 감싸고 있다.

선원 밖 세상의 모든 소식을 외면한 선객들은 새벽 3시 죽비 예불을 시작으로 하루 10시간씩 좌선하며, 11월부터 한 달 동안 실시하는 가행정진에는 하루 12시간씩 좌선한다. 납월 8일부터 일주일은 24시간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으로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에 들어간다.
일반정진은 좌선으로 경직된 몸을 풀고 마음을 고르는 방선시간이 주어지지만 가행정진은 새벽에 입선하면 밤 12시에 방선하여 취침에 든다.

잿빛 승복을 여미며 결제에 든 선객들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리전 계단을 오르고 있다. 가을을 흔들어 겨울을 깨우고 하늘로 달려간 솔바람이 구름을 밀어내고 맑은 햇살을 피어 올린다. 구름과 바람이 한 호흡으로 사리전에 찬란한 빛을 뿌린다. 자연이 전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마음 밭에 어떤 씨앗을 심어야 하는지 침묵의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선승의 향훈으로 가득한 천년 고찰 대원사는 바랑 가득 화두를 짊어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을 운수납자들에게 지치지 않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다.